<칼럼1> 정부는 왜 기업에 성장유인을 주지 않나
- 경제회복 구상이 헛꿈으로 끝나지 않기 위한 조건
좌승희
경제성장과 발전이라 부를 수 있는 소득의 향상과 부의 창출을 이룬 인류의 경제발전사는 오직 지난 200여년에 불과하다. 그 이전의 수 천 년을 인류는 농경사회에서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했다. 농경사회 속의 인류는 모든 인생의 경제적 성공과 실패를 토지에 의존해서 살았다. 한정된 토지와 낮은 농업노동생산성 하에서 소위 말사스(빈곤) 함정을 못 벗어났다.
그러던 인류는 19세기 초 자본주의적 기업인 주식회사라는 놀라운 사회적 기술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오늘날의 산업사회, 지식기반사회를 일으켰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삶의 성공과 실패, 중산층이 되느냐 마느냐의 운명을 기업에 맡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경제적 삶의 바탕으로서 토지를 대체한 것이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총국민생산에서 농업의 비중이 경험적으로 한자리 수 그것도 대체로 5% 이하로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자본주의 경제를 기업경제라 부른다. 성공한 경제와 실패한 경제의 차이는 바로 얼마나 경쟁력 있는 기업을 많이 키워 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저작자] 태초 그 이전 [이미지출처] http://blog.naver.com/forzacoree?Redirect=Log&logNo=80053244119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은 기업경제
이렇게 발명된 기업은 이제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과 복지의 책임자 역할을 한다. 기업이 창출하는 일자리가 바로 복지의 원천인 것이다. 좋은 기업에 일자리를 확보하느냐 마느냐가 바로 중산층 도약의 갈림길이 된 것이다. 기업이 바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핵심동력인 셈이다.
그래서 기업의 고용창출능력이 저하되는 경제는 바로 중산층의 몰락을 통해 농경사회와 같은 모두 가난한 사회로 진입하게 됨을 의미한다. 실패한 사회주의가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고 모든 자본주의적 기업을 폐지, 몰수함으로써 바로 모두가 평등하지만 하향평준화가 되어 다 같이 빈곤해지는 농경사회로 역주행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투자를 하지 않고 새로운 창업도 없으면 경제는 성장하지 않고 일자리 창출이 멈추거나 줄어들 것이며, 이에 따라 중산층은 무너지고 경제가 하향평준화되면서 소위 경제양극화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소득원이 없으니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일자리 전망이 없으니 청년들이 결혼을 할 수 없어 애를 낳지 못하니 출산율이 떨어져 고령화 사회가 되고, 소득원이 없으니 총수요가 정체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세계경제가 직면한 저성장과 일자리 부족, 소득 불평등, 저 출산,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증가, 총수요의 부족 등, 이 모든 문제가 바로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과 복지의 원천인 기업의 투자마인드와 일자리 창출능력의 저하에서 오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바로 자본주의기업경제의 선순환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정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함정
경제의 성장과 발전은 성장하는 기업이 대접받음으로써 동기가 부여되어 성장의 유인이 충만해지고, 새로운 창업이 활성화되어야 가능해진다. 정부의 정책은 물론 경제내의 각종 제도적 유인구조가 신상필벌의 시장원리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여 남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개인이나 기업에 유리하게 되어있어야 더 훌륭한 개인이나 기업이 더 많이 생기고 경제 또한 역동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이러한 성장의 유인이 차단된 경제는 정체를 피할 수 없으며 재정금융정책으로 돈을 풀어봐야 잠간 반짝 경기가 살아날지는 모르나 결국 원래의 무기력한 정체국면으로 회귀하게 된다. 기업이나 국민들이 자조(自助)적으로 자신의 경제적 미래를 개척해 나갈 유인이 사라진 나라는 결국 사회주의가 망한 것처럼 하향평준화를 피할 길이 없게 된다.
전후 세계 자본주의 시장경제 국가들은 사회주의권과의 대립 속에서 수정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경제평등이념을 달성하기 위한 각종의 유사 사회주의적 제도와 정책들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경제사회의 균형발전이념이 보편화되어, 대도시권 성장 규제와 무차별적인 지방 육성을 통한 지역균형발전, 대기업규제와 법인세의 지속적 인상과 중소기업에 대한 과도한 보호 육성이 금과옥조로 통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의 과도한 정치세력화, 개인 간의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재분배강화와 고율의 부유세 부과가 시행됐다. 국민 모두의 경제적 역량강화라는 그럴싸한 명분하에 결국 수월성(秀越性)을 결여한 교육이 보편화됐지만, 결국은 대졸자를 양산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게 경제사회적으로 균형되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옳은 판단이라고 그동안 우린 착각을 해왔다.
이러한 경제, 사회, 지역, 기업생태계 등 국민생활 모든 부문에 걸쳐 균형, 평등, 분배정의 등의 목표는 결국 기업들과 개인들 간의 경제적 결과의 차이를 없애려는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 도입으로 이어졌다. 역설은 명분이 어떠하던 각자가 이룬 경제적 성과와 그 보상간의 괴리를 가져오고 결국 이들의 성장과 발전의 의욕과 동기를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내가 노력하여 이룬 성과에 못 미치는 보상을 받게 되면 어느 누구도 열심히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제2차 대전 후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선후진국 구별 없이 걸어온 경제민주화와 사회민주주의 길이다. 이런 유사 사회주의 이념에는 칼 마르크스의 반(反)대기업 정서가 뿌리박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 어디서 왔는지를 우리는 잊고 있다
단순화해서 보면 그는 자본주의적 대기업의 등장을 바로 자본과 노동의 계급투쟁과 소득불평등의 원천이라고 본다. 물론 그는 대기업이 결국 자본주의 소멸을 자초할 것이라고 잘못 예고하기도 하였지만 이 관점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기업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이다. 대기업이 없는 사회가 바로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라는 논지이다.
그래서 이런 이념을 열심히 따랐더니 세상은 이제 선진국을 중심으로 기껏해야 0에서 1-2% 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본주의적 기업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한 세계 경제회복의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국도 이에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개발연대 기업의 성장을 무기로 하여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동반성장을 이룬 나라였으나 오늘날은 기업의 역량과 의욕이 감퇴되면서 장기성장추세하락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악순환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경제의 한강의 기적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두 잊고 있는 셈인데,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개발연대에는 국가가 항상 수출우수기업을 우대하여 지원하면 이들 기업들이 수출수익을 그대로 국내로 환원하여 내수투자에 나서고 이것이 나아가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에 대한 수요증대로 이어졌다. 이것이 기업성장과 신 기업의 창업, 나아가 서비스업 수요증대까지 유도하니, 결국 중산층이 늘어나고 소득분배도 개선되어 온 경제가 수출 하나로 모두 동반 성장할 수 있었다. 선순환의 행복 경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수출총력지원이 기업의 국내투자를 이끌면서 국내경제의 동반성장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성장하는 기업들이 바로 한강의 기적과 동반성장의 선순환을 이끈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에는 수출은 열심히 지원하면서도 경제력 집중 청산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균형발전이니, 지역균형발전이니 하여 대기업투자규제, 수도권규제 등, 경제적 약자를 위한다는 규제가 만연되면서 수출대기업들이 국내투자를 기피하게 되었다.
더구나 민주화 바람을 타고 노조가 무소불위의 전투적 기득권노조화 되어 국내기업의 해외 탈출을 조장하고 외국인투자를 막아 국내투자신장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수출증가에도 불구하고 내수투자가 정체, 감소되면서 그 동안 수출과 내수간의 동반성장의 선순환구조가 차단되고, 저성장과 일자리정체로 중산층이 축소되면서 소위 소득양극화 등 온갖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할 역량이 있는 기업은 이제 국내가 아니라 해외 투자에 열을 올리는 국내투자 공동화 현상이 만연되게 된 것이 지금 한국경제문제의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법은 어렵지 않다. 투자할 능력이 있는 대기업에 대한 국내투자규제를 과감히 풀고, 노조의 전투성을 완화시키고, 수도권규제를 풀어야 한다. 나아가 기업의 규모와, 사업 분야, 입지에 따른 차별적, 즉 정치적 규제를 다 걷어내는 것도 필수다.
대기업에 대한 문어발 규제부터 풀어야
즉 모든 기업들과, 이들의 투자가 차별 없이 법 앞에 평등한 대접을 받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해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천은 어려워 보인다. 대기업 투자규제 완화의 핵심 반론은 경제력 집중 문제이다. 그러나 올바른 경제학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경제력이 있음과 이를 남용하고자 하는 유인은 별개의 문제다.
돈이 많다고 다 길거리에 날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자기에게 (예컨대 마케팅 차원에서) 도움이 될 때만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대기업이 그 힘을 남용할 유인을 제거하면 되지 그 투자와 성장 자체를 규제하면,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해온 것처럼 경제력집중 문제는 해결 못하면서 기업의 투자와 성장유인만 차단하여 저성장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해법은 바로 소위 대기업에 대한 문어발 규제를 풀어 대기업간의 치열한 경쟁을 촉진하고 나아가 중소기업육성 정책을 수월성위주로 전환하여 더 많은 대기업을 창출하여, 대기업부문에 한눈을 팔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시장경쟁압력을 창출함으로써 실패가능성을 높여 자칫 함부로 힘을 남용하면 오히려 경쟁자에게 잡힐 수 있다는 시장신호를 끝없이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업의 성장유인이 살아나 경제의 성장동력을 살려낼 수 있고 동시에 경제력남용을 방지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 되는 셈이다. 이 정책은 궁극적으로 대기업간의 경쟁활성화로 대기업경쟁력향상과 나아가 중소기업에 대한 수요증대와 그 성장환경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더구나 이 정책은 대기업들의 2-3세 경영권세습의 실패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이를 보다 신중하게 하도록 하는 유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결국 이 정책은 차단되었던 자본주의 동반성장의 선순환구조를 살려냄으로써 지금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정치지도자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지도자를 못 갖는다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