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신정(神政)국가 또는 사교집단
- 북쪽의 저 이상한 나라를 분석하는 상징과 은유
이응준 (소설가)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은에 이르고 있는 저 해괴한 체제는 이른바 파시즘이라는 낯익은 용어로 규정이 가능한 것인가? 북핵이라는 어둡고 두려운 물질의 본색은 과연 무엇일까? 또 그것은 향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얼마나 급격하게, 어느 극단으로까지 몰고 갈 것인가? 이런 생뚱 맞은 질문들을 기왕의 정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상징과 은유의 틀 안에서 설명해 보는 것이 한반도의 엄중한 현실을 보다 세밀히 살피는 일개 각주(脚註)라도 되었으면 싶다.
싫든 좋든, 고래로 우리 민족의 피 속에는 서구 이성주의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강력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단도직입으로 요약하자면, 다름 아닌 샤머니즘이다. 이것이 해방 이후 이남에서는 자본주의와 개신교 사이에 흘레붙었고 이북에서는 공산주의가 근대화에 실패해 왕조로 퇴행하는 과정에 스며들었다. 부흥성회에서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통성 기도하는 신자들의 사진과 김일성이 죽었다고 평양 김일성 동상 앞에서 울부짖는 인민들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라, 대체 뭐가 다른지.
공산주의가 근대화에 실패해 왕조로 퇴행하기까지
한민족의 샤머니즘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표출된 사례가 대한민국에서의 2002년 월드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한 ‘신명났다’는, 서구 인문학에서의 광기라는 개념이 감히 포용할 수 없는 도저한 미스터리다. 한편, 북한은 신을 대리해 종교제도가 통치하는 신정(神政)국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 인간이 유일신으로 등극해 나머지 모든 인간들을 직접 지배하는 거대하고 기이한 사교집단이 돼버렸다.
본시 공산주의 자체가 기독교와 유사한 철학적 원리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아니나 다를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김일성답게 그 스스로는 성부, 김정일은 성자, 주체사상은 성령으로서 자리 잡아 성삼위일체를 이루었다는 괴로운 도식은 언제부터인가 일반적인 논설로 회자된 지 오래다. 그러나 나의 새로운 의심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됐다. 정말 김정일이 예수라면 인민들이 제사장들의 권위와 속박에서 벗어나 신과 직통하는 자유의 경지, 즉 개혁개방을 펼쳐내야 했던 것 아닌가?
또한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남한 주사파의 사도 바울인 김영환이 1991년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을 때 정작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모르더라는 차마 웃지 못할 일화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북한에 대한 성삼위일체의 비유는 그야말로 안일한 오류였구나! 성자로서의 김정일과 성령으로서의 주체사상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아직도 북한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야훼 김일성의 참혹한 질투만이 형형한 구약 시대로구나! 고로 작금의 북핵은 바로 그 김일성의 망령이 육신을 얻어 부활한 현현(顯現)인 것이다. “세계사는 신의 현현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은 헤겔이다.
북한 주민들을 위한 메시아는 과연 누가 될까
김정일이 정말 그러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을 중국처럼 변화시킬 수 없었던 안쓰러운 까닭은 간명하다. 한낱 사악한 인간의 것일 뿐인 자신의 요망한 가계가 드러나는 게 겁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는 김정은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법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는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악이라도 범하고 만다.” 가짜 신의 가짜 손자인 김정은은 오는 세상을 정말 믿고 싶어도 절대 믿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서 북핵을 정말 포기하고 싶어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야훼(북핵)가 삭제된 구약에서 야훼의 모조품인 자신 역시 곧바로 삭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외통수다. 딜레마인 것이다. 따라서 향후 김정은이 북핵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이다. 김정은 정권이 “어떠한 악이라도 범하”며 계속 메말라가던 끝에 모종의 사태로 인해 갑자기 망하고 북핵이 포기되던가, 악마의 수줍은 고해성사처럼 북핵을 포기한 김정은 정권이 국경을 넘어 밀려드는 세계의 물결에 안팎으로 휩쓸려 속절없이 망하든 가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새로운 시대, 북한의 구약을 깨고 신약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그리스도는 누구일 것인가?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에 절망한 나머지, 노아의 방주처럼 생긴 욕조 안에서 질식한 듯 숨져 있던 황장엽은 살아생전 그런 역할을 떠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인 나는 북한 인민들 스스로가 그 메시아적 주체가 되리라고 태연히 상상한다. 그리고 어떠한 양상으로 촉발될지 모르는 이 대역사는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런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을 뜻한다.
예수는 목수였으므로 그 십자가는 예수 스스로 만든 십자가였다는 것 또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북한을 탈출했다가 다시 김정은에게 붙잡혀간 청소년들의 얼굴에서 가시면류관을 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있는 예수의 얼굴을 본다. 이제 그들을 십자가에서 내리고 새로운 나라에서 부활시키는 일은 우리 모두의 신약성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