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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브라더 ‘눈 먼 민족주의’에 도전한 제 3의 목소리
서평 조우석   |  2015-04-24 18:19:27  |  조회 2827 인쇄하기

빅브라더 ‘눈 먼 민족주의’에 도전한 제 3의 목소리

 

-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著



서평 조우석 <문화평론가>

 

 

민족주의 정서, 이게 문제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넓은 공통분모를 차지하는 민족주의는 비유컨대 양날의 칼이다. 적절하게 활용될 경우 사회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내겠지만, 너무 강세여서 콘트롤이 잘 안 될 경우 나치 독일의 파시즘처럼 파괴적인 맹목(盲目)의 힘으로 치닫는다. 그런 사회 풍토에서 창조적 지성이 숨 쉴 수 없지만, 우리에겐 특히 현실적 위협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렇게 오도된 민족주의는 좌파 민족주의 북한과 동질감을 갖고 있다. 그게 ‘우리 민족끼리’의 NL정서이고, 해산된 통진당 자주파와 닮은꼴의 집단심리로 이어진다. 리퍼트 미 대사를 향해 테러를 감행했던 좌파 민족주의자 김기종도 눈먼 민족주의의 맹목성이 끝을 달린 전형적인 사례였다는 것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한국사회 최대 현안이자, 잠재적 위협인 민족주의


그래서 민족주의란 한국사회 최대 현안인 동시에 잠재적 위협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대한민국 역사>(기파랑)의 저자로 유명한 경제학자 이영훈 교수의 말처럼 1980년대를 기점으로 민족주의의 성격이 한 차례 바뀌었는데, 당초 민족주의는 건국과 부국에 필요한 정치적 동원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의 일민주의(一民主義),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의 구호가 나왔다.


이후 민족주의의 성격 변화는 좌파가 주도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그들은 민족주의 바탕에 깔려있는 애국주의를 제거해버렸고,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존중도 내던졌다. 벌거숭이가 된 맹목의 민족주의 이념은 이내 북한에 대한 옹호로 연결됐다. 이내 1980년대 이후 민족주의는 반일, 반미, 통일운동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이를 염두에 둔 채 이번 달은 박유하 교수(세종대 일문학자)의 저술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펴냄)를 읽을 생각이다.


왜 이 책인가? <제국의 위안부>는 지금 금서(禁書)가 됐다. 2년 전 출간됐던 이 책을 놓고 문제적 부분을 삭제하지 않으면 판매•배포를 할 수 없다고 법원이 얼마 전 결정했다. 그 결과 4월 현재 서점에서의 책 구입은 불가능하며, 출판사는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지적대로 30여 곳에 대한 수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독자들은 5월 이후 수정본을 구입할 수 있겠지만, 그건 벌써 ‘훼손된 책’, ‘민족주의의 검열을 거친 책’이다.


필자는 수정하기 전의 오리지날 책을 어렵게 구해 정교하게 훑어볼 기회를 가졌다. 참담한 마음이다.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이래도 될까? 멀쩡한 학문적 성격의 저술에 대해 이런 압박이 과연 정당할까? 그것이야말로 민족주의의 폭력이 아닐까? 지금 정형화되고, 거의 도그마화된 반일 민족주의 정서를 위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사회적 응징을 가하는 게 좋은 일일까?”


앞뒤 관계를 좀 더 파악해보자. 서울동부지법은 2월 중순 “박 교수의 책이 사실관계를 왜곡했다”며 위안부 피해자 9명이 박 교수와 출판사 대표를 상대로 낸 도서출판 등 금지 가처분 신청 사건과 관련해 “책 내용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판매•배포•광고 등을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유가 이렇다.


<제국의 위안부>는 엄연히 정당한 학문적 활동


재판부에 따르면, “위안부 강제동원 및 위안소 운영 등에 일본이 광범위하게 관여한 점, 성노예이자 피해자로서의 일본군 위안부의 지위 등에 비춰볼 때 책의 일부 내용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격권•명예권을 중대하게 침해한다.” 재판부는 유엔인권이사회 권고와 한국 헌법재판소의 위안부 관련 결정도 들먹였다. 국제정서도 들먹이니 꽤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편견을 거두고 보면, 이런 결정은 우리 안팎의 반일 민족주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제국의 위안부> 출간 10개월 뒤인 지난해 6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법원에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과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데에 따른 판결이다. 좋다. 그런 판결은 사법적 결정일 뿐이며, 그와 별도로 학문적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평균적 시민인 내가 본 <제국의 위안부>는 엄연히 매우 정당한 학문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송을 내면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매춘부로 표현했고, 공공선에 위반된 책”이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보도기관에 돌렸다고 하지만, 그건 악의일 뿐이고 턱없는 음해라는 걸 책을 읽는 내가 증언할 수 있다. 이 책에 그런 내용은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 왜 이 책과 저자가 표적이 됐을까?


정대협이 제시한 반일 이데올로기와 다른 목소리, 학문적 자유와 양심에서 우러난 목소리를 낸 죄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종군 위안부를 동원한 일본 제국주의는 지탄받아야 할 국가범죄 집단이라고 하는 우리의 인식을 만든 정대협의 표준화되고 도그마화된 생각이 최우선이다. 이 책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죄로 찍힌 것인데, 책에는 실제로 “권력화된 정대협”의 위험성을 적시한 대목이 등장한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커다란 관심과 함께, 그에 따른 힘을 얻으면서 정대협은 권력화되었다.… ‘정대협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이들은 단순히 비판받는 정도를 넘어 위안부와 지원단체가 대표하는 ‘민족에 대한 사죄’를 해야 할 만큼 정대협은 민족을 대표하고 있다.”(210쪽)


왜 정대협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일까? 정대협은 1990년 발족됐다. 이후 그 시민단체는 위안부를 억압받았던 식민지 조선을 상징적 존재로 만드는데 열중했다. 얼핏 대견해 보인다. 평균적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활동에 우리가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저들이 혹시 눈먼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건 아닐까를 물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2011년 정대협은 한국사회가 꼼짝 못할 권위의 반일 이데올로기를 심어놓는 엄청난 ‘한 껀’을 했다.


그해 헌재가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違憲)”이라는 결정을 얻어낸 것이다. 그게 어머어마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정부-정치권 그리고 한국사회 모두를 반일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정대협은 일개 시민단체를 넘어 반일이나 친일이냐를 판결하는 판관(判官)이 되었고, 이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친일적 발상이나 행동을 다스리는 빅 브라더로 군림하는 중이다.


한국사회의 숨은 권력, 정대협이라는 단체


이를테면 이듬해 정대협은 한일군사보호협정을 추진하는 정부를 향해 “뼛속까지 친일”이라고 비난했다. 이러면 대중은 박수를 치고, 정부는 움찔하기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가 그래서 임기 말에 반일 활동에 더 매진했고, 그 결과 한일관계는 결정적으로 나빠졌다. 박근혜 정부 이후에 상황은 더더욱 나빠졌고, 그 배경에는 위안부 문제에 사과하라는, 정대협 식의 요구가 반복적으로 있었다.


그게 지금은 맹목적 반일(反日) 민족주의, 친중(親中) 사대주의 정서로 자리 잡았는데, 이건 심하게 균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자칫 이 나라의 안보와 외교환경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묻지마 반일 드라이브’와 친중 사대주의 모드는 철부지 네티즌은 물론, 그들에 아부하는 조중동을 포함한 선동 언론과, 문화계 거의 전체가 군불을 지피고 있는 구조라는 판단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대통령을 포함한 최고 정치지도자까지 이 판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패권경쟁이 재현되는 이 비상한 와중에 한국사회가 이렇게 나태하고(지적으로), 무책임해도(정치적으로나 전략으로)되는 걸까? 왜 누구 하나 나서서 “이건 아니다”라고 말을 못하는가? 그 일부를 제기한 책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판매금지 가처분을 한 법원의 결정은 그런 집단정서를 반영하는 게 아닐까?


그 점에서 “한국사회가 ‘정대협의 생각’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언론과 관련 학자들이 ‘정대협의 생각’ 이외의 생각을 국민들에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15쪽)라는 저자 박유하 교수의 지적은 백번 천번 유효하다. <제국의 위안부>가 제기한 문제는 모두 정당하다. 그리고 모두는 반일 민족주의가 일부로 외면했거나 곡해시켜온 것인데, 이를테면 일제가 조선인 처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인식 자체부터가 사실이 아니다.


소녀와 처녀들을 위안부로 데려간 것은 우리 머리 속에 정형화된 일본 공권력이 아니다. 실은 이른바 ‘색시장사’에 나선 조선인 업자나 포주라는 게 정확한 얘기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필요로 한 것은 맞지만 사기 등의 불법적 수단으로 ‘강제로 끌고 간’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였다는 사실,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강간이나 폭행, 감시, 고문, 중절 등의 주체가 포주였다는 사실이 이 책 위안부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다.


따라서 서울 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은 실제 ‘위안부’일 수 없다는 사실도 치밀하게 분석된다. 또 하나 알고 보면 허무한 진실이 있다.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그걸 하나로 착각했고 그래서 정대협이란 단체까지 만들었지만, 그것부터 허구다. 정신대란 일제가 만든 정식 법령(국민동원령)에 따라 전시에 부족한 근로 일꾼을 충원하는 것이고, 위안부란 다양한 형식의 매춘시설에 참여한 여성을 말한다.


지면이 짧아 여기까지다. 더 자세한 논의는 훗날을 기약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눈 먼 반일 민족주의가 드디어 정당한 학문활동에 재갈을 물렸다는 점이다. 반일 민족주의는 비판과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헌법적이고 위헌의 요소를 안고 있다. 동시에 우리의 안보 지형을 어지럽히는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아찔하기도 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고대하는 창조적 지성이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점을 경고해둔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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