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학자가 밝힌 꽤 수상쩍은 개헌론
-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최태욱 著
서평 조우석 <문화평론가>
한국정치의 최대 현안은 뭐니 뭐니 해도 국회가 추진 중인 내각제 개헌(改憲)이다. 개헌 대 호헌(護憲) 사이의 결판이 향후 1년 우리사회를 지배할 것도 분명한데, 사실 그게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의회권력을 쥔 정치인들의 속내라는 것을 이제 우리는 대강 알고 있다.
어느덧 신문 방송에서 개헌 얘기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인데, 당장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가 내년 4월 총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던 게 1개월 전이다. 그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그렇게 말하며 국회 내 특위를 구성해 개헌 공론화에 나서자고 청와대를 대놓고 압박했다. 개헌하자는 정치꾼들은 여야의 구분이 없다. 뜻있는 이들은 이게 블랙홀이 될까를 걱정할 뿐인데, 보름 전 이완구 총리가 데뷔전을 하는 국회 대정부 질의 자리에서도 개헌 합창이 들려왔다.
국회 대정부 질의 자리에서 들려온 개헌의 합창
친이• 친노의 좌장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과 이해찬 새민련 의원이 각각 첫 주자로 나서 "개헌합시다!"를 외쳤다. 이 총리가 “올해는 우리나라 경제의 미래를 가늠하는 해가 될 것”이라며 경제 문제를 걱정했지만, 이재오 의원은 마이동풍이었다. “당장 국회 개헌특위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게 야당과 똑같은 소리라는 걸 주목하시길 바란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해 말 오스트리아 식 이원집정제 구상을 밝혀 정치권을 뒤집어놨다. 대통령• 총리가 외치• 내치를 분담하는 구조의 개헌론이 그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대통령에게 사과했지만, 소신은 여전하지 않던가. 그렇다. 개헌론은 일단 대세이고, 그 주체는 국회다. 경제도 살리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는, 검증 안된 이런 식의 주장이 마구 나돌아 다닌다.
그들에 따르면 최빈국 대다수가 대통령제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는 정치적으로 분권형이고, 못사는 나라는 권력이 대통령에 집중돼 정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우리 헌정사에 대한 제멋대로의 해석도 분분하다. 직선제 개헌을 이뤄낸 1987년 헌법이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이뤄낸 건 사실이지만 28년 이후 시대변화에 대응하려면 역시 개헌밖에 길이 없다는 목소리다.
이런 와중에 최근 나온 책 중 개헌의 밑그림을 담은 최태욱 한림대학원대학교 교수의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책세상)에 나는 주목한다. 좌파 지식인들이 개헌을 극구 찬성하는 구조가 좀 찜찜하던 차에 그들의 음험한 복선(伏線)을 가늠해볼 훌륭한 분석대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야말로 열렬한 개헌론으로 가득한데, 비판적 분석이 필요함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전에 없이 보여준 좌파 학계와 정치권의 단합된 모습
이 책의 부제가 '시장의 우위에 서는 정치를 위하여'인데, 책 뒤에 보면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에서 안철수(새민련 의원),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천정배(전 법무장관)까지 그럴싸한 추천의 말을 보냈다. 전에 없던 좌파 학계와 정치권의 사이의 단합된 모습인데, 원희룡 제주지사는 "미래의 정치설계 전략서를 보는 듯하다"는 덕담까지 건넸다. 미래의 정치설계 전략서? 그게 맞는 소리다.
좌파 지식인들과, 여야를 가리지 않는 정치꾼들이 개헌 음모가 담겨있는 게 이 책이다. 최태욱이라는 좌파 교수가 볼 때 현행 영국 미국 식의 다수제 민주주의는 쇠락하고 있고, 유럽식의 합의제 민주주의가 대세다. 다수제 민주주의의 문제는 승자독식이라서 대립과 갈등이 상존한다. 반면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세력 간의 상호 의존이 불가피하며 포용의 정치가 자리 잡는다는 게 이 책에서 펼쳐진다. 이런 우회적인 말에 숨어있는 속뜻은 뭘까?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 따위란 당장 걷어치우자는 얘기다. 좌파가 그토록 원해왔던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의 내일을 앞당겨 이른바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게 중요하다. 그걸 위한 획기적 변화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하며, 그걸 위한 승부수가 개헌이다. 어느 가수의 말대로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라는 식이다.
좌파의 헤게모니를 위한 음모의 청사진이 이 책
실제로 최태욱이 말하는 개헌엔 권력구조 개편은 물론 양당제 혁파도 포함된다. 기득권을 강화할 뿐인 양당제를 소수세력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구조인 다당제로 모두 바꿔야 한다고 저들은 힘줘 말한다. 즉 지금의 세상을 뒤집어놓아야 한다는, 자못 전복적(顚覆的)인 상상력을 정치학의 이름 아래 풀어놓은 게 이 책이다. 결국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좌파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 구축을 위한 음모의 청사진이다.
구체적으로 개헌론의 출발은 좌파의 좌장(座長)인 백낙청(77)서울대 명예교수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좌파모임 '희망 2013ㆍ승리 2012 원탁회의'를 주도하며, 종북세력 통진당과 민주통합당 사이의 수상했던 야권연대를 조종하던 숨은 손이다. 그런 그가 4년 전 '2013년 체제'란 용어를 만들어낸 게 직접적 도화선이다.
대선에서 승리한 이듬해 2013년부터 완전히 새 정치체제의 판을 구축하자는 뜻인데, 그래서 <2013년 체제 만들기>(창비)란 책까지 펴냈다. "2013년 이후의 세상을 별개의 체제라 일컬을 정도로 크게 바꿔보자"는 뜻(16쪽)이라고 그가 밝힌 점에 주목하자. 즉 판을 몽땅 갈아엎자는 주문이다. 구체적으로 2013년 체제란 평화체제 구축, 남북간 국가연합체제 전환 두 가지로 요약된다.
지금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북연방제를 도입하자는 북한 대남공작의 완전 복사판이다. 성장정책과 시장경제를 상당 대목 포기한 채 복지국가-공정사회로 바꾸자는 것도 핵심 내용이다. 야권이 대권을 잡으면 완벽한 좌파세상을 만들자는 선동이었는데, 선거에서 깨지고 우파정부가 덜컥 들어서자 저들은 절망했다. 그러던 좌파들이 급기야 꺼내든 카드가 개헌론이다. 판을 흔들어 현정부를 무력화하고, 실제적인 권력교체 효과를 내려는 초대형 꼼수다. 꼼수치곤 좀 대담하달까?
“판을 갈아엎자”는 좌파의 초대형 꼼수
여기에 개헌의 불을 붙인 건 또 다른 좌파인사 최장집(72) 전 고려대 교수다. 그는 입만 열면 '실질적 민주주의'를 외친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또 필요하다는 민주주의교(敎)의 전도사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지만 그걸론 안된다는 뜻인데, 설명인즉 이렇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이 증진되고, 분배적 정의에 입각한 복지정책을 통해 부와 소득의 분배구조가 개선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렇듯 백낙청- 최장집 같은 좌파의 중진-원로가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통해 진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깃발을 들자 이런 정치사회구조 창출을 위한 장치를 어떻게 만들까가 화두로 등장했다. 이때 개헌이 필수라는 데 야권 일부가 공감했다. 그와 동시에 여권의 지도부까지 개헌론에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지금의 개헌론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다.
중요한 건 좌파 지식인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집요하게 바람을 잡아 왔으며, 그 위에서 개헌야합세력의 본산인 대한민국 국회가 지금 함께 연동돼 움직이고 있다는 전체 상황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때문에 개헌 어쩌고의 논리란 어쩌면 권력탈취를 포장하는 좌파의 논리다. 그게 개운치 않은 책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라는 책에 숨어있는 복선인데, 그점에서 이 책은 활용여부에 따라 우파에겐 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