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회원칼럼
<칼럼2> 사상전(思想戰)에서 흔들리는 우리들
조우석   |  2013-11-21 14:27:52  |  조회 3788 인쇄하기
<칼럼2> 사상전(思想戰)에서 흔들리는 우리들

 

- 황장엽의 목소리로 되새겨보는 국정원 개혁의 정신


조우석 <문화평론가>

 

 

천안함 폭침 사건 직후 당시 이명박 정부의 고위 인사가 조언을 구할 겸 거물 망명객 황장엽을 찾아가 물었다.“북한을 너무 몰아붙이면 코너에 몰린 쥐처럼 고양이를 물지 않을까요?”황장엽이 기가 막혀 되물었다.“아니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란 말이요? 서울 불바다를 호언하는 저들이 고양이이고, 한국이 쥐 꼴이 아닙니까?”생전 그의 술회에 따르면, 천안함 사건이 터진 뒤 김정일이 이번엔 정말 오산했구나 하고 그는 판단했다. 안보의식을 다질 수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다 싶었다.


희한한 것은 사건 초기 들끓던 국민의 분노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천안함 폭침설을 못 믿겠다는 주장까지 끈질기게 등장했다. 한국에 전쟁공포증이 이렇게 강한 줄 미처 몰랐다는 게 한참 뒤 황장엽의 지적이었다. 그게 2010년 6월의 일인데, 타계 몇 개월 전의 황장엽은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한탄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스무 명이라 해도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국민의 20~30%가 그렇게 믿고 있다니!


황장엽은 왜“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한탄했나


“이게 무슨 나라 꼴입니까? 한국이 미국을 떠나서 과연 버틸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잘 살아도 사상전(思想戰)에서 지면 모든 게 끝입니다. 여진족 30만 명이 거대한 인구의 중국을 쓰러뜨리고 청나라를 세운 걸 생각해보세요.”


절규에 가까운 그의 한탄이 요즘 더욱 리얼하게 다가온다. 국정감사장에서 한 장성이 남북이 일대일로 붙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패배한다는 답변을 했다.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다. 뒷골목 건달이라도 싸울 때는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 아니던가. 며칠 뒤 김관진 국방장관이 같은 질문에 북한은 멸망한다고 단호하게 발언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그 장성이 말실수했거나 거두절미하고 잘못 전달됐으리라고 믿지만, 북한을 보는 우리의 집단정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하다.


더 곤혹스러운 건 국정원 개혁 논의 쪽이다. 국정원 댓글을 둘러싼 정쟁이 국정원 개혁을 재촉하는 모양새인데, 이런 구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 이 나라에는 정보기관을 보는 전략적 마인드도 없을뿐더러, 그 이전에 국가관 자체가 휘청대는 상황이다. 야당이 주장하는 개혁안은 국정원 해체안 혹은 무력화안인데, 저들은 그걸 민주질서 마련을 위한 필수 장치로 착각하려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게 북한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이 기관의 존립 자체를 흔들고 있다.


여기에 일부 시민단체와, WCC 등 종교단체까지 틈만 나면 반국가적 언동을 일삼는다. 왜 이런가? 국가전략의 큰 그림 부재, 뻥 뚫린 국가관의 뒤에는 황장엽이 지적했던 우리의 전쟁 공포증이 똬리 틀고 있는 게 분명하다. 포괄적으로 말해 우리는 아직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북한에 대한 근거 없는 열패감(劣敗感)인데, 1948년 8월 역사적인 대한민국 건국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는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문제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구조적인 책임을 질 영역은 따로 있다.


한국사회에 똬리 튼 전쟁공포증, 레드콤플렉스


그건 좌파사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사학계의 문제인데, 국사학계는 정통성을 가진 북한은 이니셔티브를 쥔 갑(甲)이자 고양이고, 그게 빈약한 우리는 을(乙)이자 쥐의 신세라는, 말도 안 되는 인식을 자꾸만 심어주는 꼴이다. 말도 안 되는 대한민국 정통성 부인 현상이 만들어낸 괴이쩍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게 결국 우리 삶의 밑둥치인 국가 안보를 흔들고, 결국 코리아 리스크로 이어지며, 우리 일상에 정치적 불안의 그늘을 짙게 드리운다. 이런 상황을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볼까? 다음은 황장엽의 고백이다.


“탈북자들이 하늘같이 믿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자유의 조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진지는 천만 뜻밖에도 좌파 용공 세력이 판을 치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북한을 민주화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희망이고 목적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좌경용공 반미세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 목숨 바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절감합니다.”(<북한민주화와 민주주의적 전략>, 시대정신, 81쪽)


황장엽은 그 책에서 해방 직후 자유민주주의 기치 아래의 건국과 함께 한미동맹을 고수하며 나라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 정체성의 초석을 마련한 지도자라며 그의 역사적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부국의 길을 제시한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거듭 찬사를 보낸다. 그건 계급투쟁이라는 역사의“보편타당성을 가지지 못한 그릇된 명제”(황장엽 지음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171쪽)를 앞세워 공산혁명을 시도했던 김일성의 역사 실패에 대한 가장 냉혹한 지적이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북한에 선심 쓰자는 것인지, 꼬리 내리자는 뜻인지…


필자가 그를 20세기 한국인이 산출해낸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자이자,“한국지성사의 영웅”이라는 평가에도 동의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문제는 그가 걱정했던 종북 좌파의 발호다. 생전의 황장엽이 햇볕정책을 앞세우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반대를 했음을 기억해두자. 그는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란 책에서“북한 통치자들에 대한 그러한 선심은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베푸는 아량이 아니라 북한의 호전성 앞에 겁먹은 사람들의 분수없는 자기 위안”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냉철하고 혹독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전쟁공포증은 유독 평화주의자, 민족주의의 가면을 쓰길 좋아하는 좌파세력에게 많다는 따끔한 소리도 그는 잊지 않았다. 이 무리에 대한 일갈은 단호했다.“냉전의 마지막 유물인 북한의 수령 절대주의 체제와의 투쟁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진보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 선과 악의 원칙적인 투쟁이다. 북한 체제와의 투쟁에서 전술적인 양보와 타협은 있을 수 있어도 전략적 양보와 타협은 허용될 수 없다.”(323쪽) 이 말이 그의 타계 3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침으로 남아있다.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 해체라는 한국 내 이른바 진보세력의 구호는 북한의 이해관계와 너무도 맞아떨어진다는 점도 그는 익히 파악했다. 당장 지난 11월8일 부산에서 폐막된 세계교회협의회(WCC) 10차 총회만해도 그렇다. 그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를 채택했는데,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북한정권에 대한 경제제재•금융제재 해제 ▲외세(外勢)의 한반도에서의 모든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삼척동자가 봐도 어이없는 헛소리에 다름 아닌데, 그런 구호는 가톨릭의 이른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 사이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동포애를 말하고, “우리민족끼리”라는 헛구호를 외치는 그들은 혹시 자신의 신념이 민족화해를 염두에 둔 충정이자, 냉전 이후 시대에 걸 맞는 앞서가는 태도라고 자부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체제경쟁이 끝났다는 때이른 자기만족이자, 스스로를 무장해제하고 여전한 남북간 체제대립에 대한 경각심을 허무는 바보짓이다. 더욱이 알게 모르게 북한 통일전선 전략의 포로가 되는 길이다. 황장엽의 그런 지적은 공허한 책상물림의 공상이 아니다. 1994년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김일성 전략의 하나가 그것이었다는 구체적인 증언을 한다.


당시 김일성은 꽤 흥분됐다. 공동집권자 노릇을 하던 그의 아들 김정일의 머리 속도 빠르게 돌아갔다. 둘은 당시 회담이 소련 동유럽 몰락 이후 체제 붕괴의 위기를 벗어나는 묘수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당시 김일성-일성 부자는 황당하기까지 한 저들의 통일전선 전략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자기들이 서울에 가면 몇 백 만 명이 환영할 것으로 믿었으며, 궁극적으론 오래 전부터 심어놓은 남쪽의 지하당 조직을 활용해 친북성향의 정권을 서울에 세울 수 있게 한다고 너끈히 계산했다.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잘못된 구호들


그 이후의 그림은 뻔하다. 미군을 철수하게 조종하고, 그 전후에 국가보안법을 없앤 단계에서는 연방제라는 포장 아래서 한국을 거저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북한의 휘청거리는 경제위기도 남한의 경제력을 이용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감히 생각했는데, 그런 전략은 지금 평양의 독재자 김정은도 마찬가지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굶어 죽는 사람이 좀 나오더라도 굳이 상관없다. 선군 전략을 유지해 핵무기를 유지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한국은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여긴다.


그게 한국을 발바닥으로 바라보는, 턱 없이 고압적인 생각에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사회가 전쟁공포증에 스스로 쥐 신세를 자청하고 있다면, 평양의 독재자는 위압적인 고양이 노릇을 하는 셈이다. 황장엽은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남한의 경제력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보다 (남한의) 생산력이 두 배가 되고, (심지어) 미국보다 앞섰다고 해도 발바닥으로 봅니다. 그걸 여기 사람들은 몰라요.”


한국이 쥐 신세로 남아있고, 그런 한국을 북한은 발바닥으로 보는 게 현실인데, 그런 오판 아닌 오판을 유지시키는 게 다름 아닌 한국사회의 종북주의 세력이다. 반복하지만 그들의 지치지 않는 활동과 목소리가 국정원 해체 같은 섣부른 목소리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드는데, 그건 한국사회의 오늘을 보는 큰 그림과 대전략의 부재를 보여줄 뿐이다. 실로 안타깝게도 그게 다시 북한의 대남전략에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정원 개혁 문제를 정파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말고, 위기의 한반도를 관리하는 시야 속에서 다뤄야 한다는 것 기본에 속한다. 더욱이 2013년 말과, 향후 10년은 한반도 상황의 전면적 변화의 분기점이고, 중요한 시점으로 관측된다. 북한 급변사태, 준비 안된 통일의 대두, 그에 따른 혼란 등도 얼마든지 예상된다. 평화냐 혼란이냐의 갈림길이다. 그래서 24절기(節氣)로 따지면 입춘인데,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이 문턱을 어떻게 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입춘에 장독 깨진다. 섣부른 국정원 개혁은 우리 스스로 망치를 들어 장독을 깨는 어이없는 행위일 수 있다.

      
굿소사이어티
덧글쓰기 | 전체글 0개가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0/1200 bytes  
 
732 연말, 거울에 비춰본 2013년 우리 모습  우창록 13-11-21 3921
731 <칼럼2> 사상전(思想戰)에서 흔들리는 우리들  조우석 13-11-21 3788
730 꼬리에 꼬리를 문 NLL에 대한 거짓말  2  강규형 13-11-21 3715
729 법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한 판결  10  이철영 13-11-21 4124
728 <서평1> 진실의 유통량 늘릴 때  조우석 13-11-21 4055
727 지혜를 모아 사회적 난제를 풀고자 합니다  1  우창록 13-10-23 4033
726 보험사기 만연한 한국은 왜 저(低)신뢰 사회인가  9  강규형 13-10-23 4090
725 <에세이1> 국립극단이 올린 낯 뜨거운 정치연극  조우석 13-10-23 3998
724 <에세이2> 박수는 언제 치나요?  6  이철영 13-10-23 4586
723 <서평1> ‘분단시대의 영웅’ 탈북자들의 증언 지구촌은..  조우석 13-10-23 4226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