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梧里) 정승과 황희(黃喜) 정승
이철영 (재)굿소사이어티 상임이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선생이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되었다. 대하 역사드라마 ‘조선왕조 오백 년’의 작가 신봉승 선생이 작년 대선 전에 출간한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 속에서 설정해본 '드림팀 정부 구성' 얘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정통한 신봉승 선생은 조선의 임금 27명과 역대 유명인사들을 통틀어 우리나라의 대통령에는 역시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으뜸이고, 국무총리에는 오리 정승(梧里政丞) 이원익 선생이 가장 적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오리 정승 이원익 선생은 조선시대 3대(선조, 광해군, 인조)에 걸쳐 영의정만 여섯 번, 40 여 년간 재상을 지내며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인 88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인조반정(仁祖反正), 정묘호란(丁卯胡亂) 등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을 모두 겪었다. 그는 고매한 인품을 갖추고 평생 백성을 섬기며 청렴결백과 정직을 온 몸으로 실천한 명재상이었으며, 검소하고 후덕한 지도자의 표상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왜‘황희 정승’ 대신 ‘오리 정승’일까?
‘오리정승’보다 우리에게 더 잘알려져 있는 인물이 ‘황희정승’(黃喜政丞)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 선생이다. ‘황희정승’과 ‘오리정승’은 조선조 여러 대(代)의 왕들을 모셨고, 노후에 왕으로부터 궤장(几杖: 의자와 지팡이에 몸을 기대더라도 군주곁에 더 머물러 국정운영을 도와 달라는 뜻을 담아 공이 많고 70세 이상인 벼슬 1품 이상의 신하에게 왕이 내리는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 받았고, 사후에 각각 세종과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주: ‘廟庭配享’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신위를 그가 모시던 임금과 함께 종묘에 모시는 일이다). 작가 신봉승 선생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재상으로 존경 받는 ‘황희 정승’ 대신 ‘오리 정승’을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감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황희 정승’은 고려 말기에 공직에 출사(出仕)한 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않고 외부와 차단하고 모여 살던 곳)에 은거하다가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의 요청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그 후 6조(六曹: 刑, 兵, 禮, 吏, 戶, 工)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했으나, 양녕대군(讓寧大君) 세자 폐출을 반대하여 태종(太宗)의 노여움을 사서 한 동안 유배되었었다. 세종 즉위 후 다시 예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후 궤장을 하사 받고 영의정에 올라 87세로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세종을 보필했으며, 사후(1452년, 문종 2년) 세종묘(世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선 관료집단은 재상직을 사수 위해‘황희 정승’을 내세웠다
‘황희 정승’은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왕과 관료집단이 모두 선호하는 인물이었으며, 태종과 세종은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세력을 키우지 않은 그를 오랫동안 재상직에 앉힘으로써 왕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재상직을 폐지하여 관료집단을 견제하고 황제독재체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조선의 관료집단은 재상직을 사수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 양반 관료집단에서 청렴강직하면서 자기세력이 없는 사람을 재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황희가 좌의정•영의정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즉, 조선의 양반 관료집단은 황희라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재상직을 계속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황희 정승’은 한때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불릴 정도로 축재(蓄財)와 매관매직으로 비난을 샀으며, 난신(亂臣: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 박포(朴苞)의 부인과 간통한 사실 등이 실록(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사위를 방면하여 파면되었고, 사헌부에 사사로이 감형을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는 등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 청렴한 정승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그의 사후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계층이 '황희 신화(神話)'로 그를 미화하여 그의 부패와 물의는 가려졌고, 태종이나 세종은 왕의 심리를 잘 간파하며 정세판단과 업무수행 능력이 탁월한 그를 끝까지 중용했다. ‘황희 정승’의 부패와 비리에 관한 사실들은 1970년대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한글로 국역하는 과정에서 널리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정의감이 투철하고 공사가 분명했던 ‘오리 정승’
‘황희 정승’에 비하면 ‘오리 정승’ 이원익은 청렴함이 남다르고 성품이 소박하여 자신을 과시할 줄 몰랐으며, 정의감이 투철하고 공사가 분명한 충직(忠直)한 청백리(淸白吏)였다. 그는 40여 년의 공직생활 동안 부정한 재물 한 톨도 집안에 들이지 않고 세 칸짜리 초가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며, 공직(公職)을 마친 후에는 필부로 낙향하여 스스로 농사짓고 돗자리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승지로부터 전해들은 인조(仁祖)가 그의 청렴함을 기려 집을 하사했을 때에도 그는 “신(臣)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을 일입니다 <관감당(觀感堂) 하사교서 中>”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는 '(이원익이)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집에 떨어진 갓을 쓰고 쓸쓸히 지내니 아무도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원익은 그의 청렴함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많이 남겼다. 사는 집이 너무 낡아 보수공사를 하려던 이원익이 호조판서(戶曹判書: 지금의 재무장관 격)로 임명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공사를 중단했다. 나라의 재정책임자가 새로 집을 짓는다면 재물에 대한 의혹이 생기게 되고, 이권을 탐하는 자가 몰려들게 되고, 건축재나 노임 등이 집 짓는 자들에게 표준이 되어 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백성과 나라를 섬기는 이원익의 큰 뜻을 엿볼 수 있는 이런 일화도 있다. 동전 한 닢을 연못에 빠뜨리고 우는 아이를 본 이원익이 인부를 동원해 연못 물을 퍼내 동전을 찾아주고 인부들에게 일당 열 닢을 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동전 한 닢을 찾으려고 그 많은 돈을 들이는 이유를 묻자 그는 “연못에 빠진 돈을 찾지 않으면 나랏돈 한 닢이 줄어들지만 내게서 나간 열 닢은 이 나라 백성이 쓸 것이니 나랏돈이 줄어들 일이 없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효종은 이원익이 타계한 지 17년이 되던 해에 그를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는 교서(敎書)를 내리면서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처럼 수줍으나 일을 만나면 패연(沛然)히 여유가 있다”고 그를 극찬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신봉승 선생이 ‘황희 정승’ 대신 ‘오리 정승’을 우리나라 국무총리 감으로 정한 이유를 알 듯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오리정승’처럼 많은 녹봉(祿俸)을 받으면서 제 집 한 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무능한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느냐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기정당화나 억지주장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결국 자기 됨됨이만큼 생각하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오리정승’이 자신의 녹봉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빈한(貧寒)한 생활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오늘날의 정치적∙현실에서 ‘오리정승’처럼 공사(公私)에 걸쳐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능력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오리정승’같은 인물을 찾을 수 없다면 고위공직을 맡은 후에라도 ‘오리정승’을 본받아 청렴과 정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을 뽑아야 마땅하다.
"남을 비평하려거든 자신부터 헤아려보라"는 교훈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文民政府)에서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20년간(1993~2013) 우리나라의 17명의 국무총리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1년 1개월 남짓하고, 장관들의 재임기간은 평균 1년 2개월 정도이다. 5년의 대통령 임기 중 총리와 각 부처 장관들이 평균 4번 이상 바뀌는 꼴이다. 결국, 요란하기만 한 국회 인사청문회(2000년 6월 인사청문회법 제정)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거나 대통령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총리와 장관을 갈아치운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1년 남짓 임기의 총리나 장관이 재임기간 동안 과연 소신과 전문성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서 총리나 장관들은 책임회피나 다음 개각에서 살아 남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심이나 과시성 업무만이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장관 평균 재임기간은 약 3년으로 4년 임기의 대통령과 임기를 대체로 같이하며, 서유럽 국가들의 장관들의 평균임기는 4년 이상으로 미국보다 더 길다. 결국 우리나라의 국정 난맥과 행정 비효율의 원인은 총리나 장관이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가 후보 본인과 자식들의 재산형성과정과 병역문제이다. 후보 본인이나 자식의 병역문제에 비리가 있었다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전 국민이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이래 이 사회 최고의 재테크수단이 부동산투자였던 현실에서 “내가 하면 투자요, 남이 하면 투기”라는 식으로 후보를 일방적으로 몰아세워서는 안 되며, 재산형성 과정에 불법이나 부정이 있었는지 만을 법의 잣대로 따져야 할 것이다.
국회 인사청문회가 후보의 도덕성, 전문성과 능력, 사명감과 소신 등을 검증하기보다 후보를 여론재판으로 몰아세워 낙마시키려는 당리당략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를 막을 수 있도록 공직자 인사검증시스템을 보완하고 인사청문회는 검증 범위를 제한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실은 고위공직자들도 문제이다. 그들은 『明心寶鑑(명심보감)』의 “欲量他人 先須自量(욕량타인 선수자량: 남을 헤아려 비평하려거든 자신부터 먼저 헤아려봐라)”의 교훈과, 많은 물의를 빚고 수 차례 파직을 당한 사실을 덮어두고 ‘황희 정승’을 조선조 최고의 명재상으로 부린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