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영조 교수의 명예회복을 원한다
- 제주 4· 3사건에 대한 학문적 발언이 왜 매도돼야 하나?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역사학
근대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퓨스 사건(1894년)을 연상시키는 사안이 등장했다. 억울하게 스파이로 몰린 유태인 출신 장교 드레퓨스의 명예회복을 위해 프랑스 지성인들이 나섰으며, 소설가 에밀 졸라는 그 중심인물이었다. 2012년 봄 한국에서는 이영조 교수 명예회복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가 2년 전 발표한 영문보고서에서 제주 4·3 사건과 광주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당하고도 학문 차원의 성격 규정을 했던 것이 도화선이었다. 한국 사회는 그에 대한 마녀 사냥에 열중하고 있다. 이를 보다 못한 강규형 명지대 교수가 이영조 명예회복 운동에 나섰다. 알려진대로 강 교수는 이 문제를 공론화한 칼럼을 신문(4월15일 조선일보)에 썼으며, 직후 사회적 반향이 이어지고 있다. 바른 사회 시민회의는 새누리당 비대위원들에 공개질의서를 보냈으며, 적지 않은 이들이 이영조 명예회복 운동에 지지의 뜻을 표하고 있다. 강규형 교수는 첫 칼럼을 수정·보완한 새 원고를 굿소사이어티 이슈 레터에 보내왔다. 다음은 전문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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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총선은 예상대로 매우 시끄러웠다. 선거란 원래 그런 것이고, 상호 비판이 난무하게 마련이다.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의 패륜적 발언들처럼 사실인 것은 마땅히 비판해야한다. 어느 사회건 하수구 문화가 존재한다. ‘나꼼수’식의 발언은 막말과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마구 배출되는 하수구 문화이다. 그러나 하수구가 상수도(上水道)가 되선 안 된다. 국회는 하수구가 아닌 상수도가 돼야할 곳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변인인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고 과거의 막말이나 패륜적 언동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사안이었다.
그것은 유권자들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제공인 것이다. 당선자 중 성폭행 논란과 정도가 심한 논문 표절 등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도 마땅히 적절히 조치돼야 한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이 남을 비방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선진사회와 후진사회의 차이 중 하나는 이런 중상모략(中傷謀略)이 통하느냐 안 통하느냐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터무니없는 모략과 잔인한 마녀사냥이 횡행하는 암흑사회다. 요번 선거에서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선거는 끝났지만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장 심각한 예를 하나 들어보고자 한다.
경희대 이영조교수는 새누리당 서울 강남을(乙) 지역구 공천을 받았었다. 그러나 공천 직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이영조 후보에 대한 무차별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됐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폭거였다. 그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위원장 시절인 2010년 11월에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영문보고서에서 “제주 4·3은 폭동” 이었고 “광주 5.18은 민중반란”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이 비방의 요지였다. 이런 음해(陰害)는 이 보고서 발표직후 한 인터넷 신문에 의해 무분별하게 주장됐고 여러 매체와 인터넷 공간에 무비판적으로 인용됐다. 국회 국정조사에서 이 문제가 제기됐을 때도 당시 야당 국회의원들은 사실 확인도 안하고 무조건적으로 이영조 교수를 매도(罵倒)했다.
이러한 ‘인격살인’은 요번 선거과정에서 재개됐고, 여기에 한나라당의 일부 비상 대책 위원들이 가세하면서 이영조 교수는 결국 소명 기회도 갖지 못하고 그의 공천은 전격적으로 취소됐다. 이 문제는 결국 발표문의 엄정한 분석을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려야한다, 한국사회 특유의 사람죽여놓고 어물쩍 넘어가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필자는 이 영문 보고서를 세세히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영조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민중반란'이라고 악의적으로 오역(誤譯)된 “popular revolt” 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revolt는 항쟁·봉기·의거·반란의 여러 뜻으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발표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이것은 항쟁이나 의거의 뜻이라는 게 자명해진다. 이영조 교수는 발표문에 "광주 민주화 운동(Gwangju Democratic movement)", 심지어는 "광주 학살(Gwangju massacre)"이란 단어를 여러 번 병기하며 5.18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했다. 참고로 5·18 기념 재단의 영문 홈페이지에도 5.18을 설명하면서 revolt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원래 revolt는 반란이란 뜻보단 항쟁이란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우리가 소시(少時)적 배웠던 1956년 ‘헝가리 의거(義擧)’는 공산압제에 대항해 헝가리 국민이 항거한 사건으로 “Hungarian Revolution” 또는 ”Hungarian Revolt”로 표기된다. 아직도 공산주의에 대해 마음속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눈에만 이 사건이 ‘반란’으로 보일지는 모르겠다.
제주 4.3 사건은 어떤가. 이영조 교수는 4.3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도입부에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a 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반란)’이 발발해 수년간 지속되었다”라고 서술하고, 그 이후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된 사실을 밝혔다. 즉 이영조 교수가 공정하게 서술했는데도 일부 매체가 의도적으로 왜곡해 비방한 것이다. 제주 4·3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공식보고서도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제헌 선거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 4월 3일 새벽을 기해 대규모 무장 반란을 조직적으로 일으켜 경찰과 경찰 가족들에 대한 무차별 살해와 방화를 했다는 점에선 이견(異見)의 여지가 없다. 초기 양민 희생은 남로당의 무장유격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장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경에 의한 과잉진압이 진행돼 적법절차를 밟지 않거나 혹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많이 발생했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여기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이다.
참고로 남로당 제주도 무장봉기의 최고지도자였던 김달삼(金達三, 본명 이승진. 4·3 발발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은 1948년 8월 2일에 제주를 탈출해 같은 해 8월 25일 해주 남조선 인민 대표자 회의에 참석해 유명한 “해주연설”을 통해 제주의 공산봉기상황을 보고해 격찬을 받으며 훈장을 받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이후 김달삼 부대(4.3 부대)란 명칭의 무장공비를 이끌고 남파돼 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서 양민학살 약탈 방화 활동을 하다가,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22일 태백산 ‘반론산’에서 국군 8사단 21연대의 토벌작전에 의해 사살됐다.
한국의 수구좌파들의 전형적인 수법은 쓰러트릴 목표를 정하고 허위사실을 가지고 무차별 맹폭을 가하는 것이다. 여기에 좌파 언론과 정치인이 합세한다. 인터넷 공간에선 생각 없는 네티즌들이 이런 허위를 무비판적으로 실어 나른다. 이교수의 경우 수구좌파의 반(反)대한민국적인 사고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됐다. 이영조 교수 건은 결국 법정에서 책임을 물어야할 사안이다. 함께 지적할 것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들의 행태이다. 급박한 선거전 와중에 신속히 사태를 진정시키려 한 점은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단 한국사회는 성숙하고 이성적인 사회가 아니기에 일단 마녀사냥이 시작되면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 해도 진실을 호도하고 허위에 동조한 것은 용인될 수 없다.
이영조 교수의 공천에 문제를 제기한 비상대책위원들은 이 교수의 발표문은 제대로 읽어봤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미국과 독일 등에서 해외 유학을 한 사람들이라 영문 발표문을 이제라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많이 평가해 봤으니 본인들 주장이 옳았는지는 양심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만약 본인들이 틀렸다고 생각된다면 지금이라도 이영조 교수에게 사과하는 것이 온당하다.
얼마 전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은 비상대책위원 이상돈교수가 이영조교수 공천취소 건은 역사관의 문제가 아니었고 너무 민감한 문제가 재론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간접적으로 공천취소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 정도 해명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이런 민감한 문제는 학문적 엄정성과 이성적 판단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도 암흑시대를 살아가는 우중(愚衆)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