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정부 아래 고생하는 성실하고 똑똑한 한국인들에게 하늘이 새해 선물이라도 보내는 것인가. 베이징 6자회담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은 엄혹한 핵겨울에 부는 한줄기 봄바람 같다. 위조 달러는 미국의 법집행에 관한 문제여서 '협상 절대 불가'라고 기세등등하던 미국 재무부가 베이징에서 북한 사람들과 대북 금융제재 해제 문제를 이틀 연속 논의했다. 그것과는 별도로 핵 문제에서는 미국이 지난달 북한에 제시한 조기 수확(Early harvest)이라는 코드의 핵 동결과 상응 조치를 지난해 9월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 꼴도 보기 싫다던 북한과 미국의 놀라운 태도 변화다.
정부 고위소식통은 회담의 성급한 낙관적 전망을 경계하면서도 북한과 미국이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만은 강하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9.19 공동성명을 만들어낸 6자회담은 제로에서 논의를 시작했지만 이번 회담은 9.19 공동성명이라는 설계도를 가지고 출발한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건물을 올리지는 못해도 기초는 세울 수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미국은 핵무기 폐기 문제를 바로 논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기 이야기라면 핵 군축과 군비 통제 문제 전부를 논의하자고 이의를 제기했다. 첫 번째 핵실험을 마쳐 핵 보유국으로 자처하는 북한으로서는 예상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지만 우선은 핵무기보다는 핵프로그램의 중단이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다.
미국은 영변 5MWe 원자로의 가동 중단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확인과 사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북한이 다른 핵시설도 자진신고하고 그것을 국제기구가 사찰하도록 하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북한은 영변 원자로 가동 중단과 국제기구에 의한 사찰을 첫 단계로 끊어 북한의 그런 조치에 대한 구체적 상응조치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북한 수석대표 김계관은 6자회담의 나머지 5개국이 구체적 상응조치를 손에 쥐여줘야 평양의 강경파를 설득할 수 있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별도로 진행하는 금융제재 문제와 핵 문제 협상에서 금융제재를 해제하면 영변 원자로 가동을 중단할 용의가 있다고 암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결국 영변 5MWe 흑연감속로의 가동 중단과 금융제재 일부 해제의 교환을 의미한다. 북한과 미국이 금융제재 해제에 관한 공동협의체 구성에 의견을 접근시킨 것은 큰 성과다. 북한은 발등에 떨어진 불 같은 방코델타아시아(BDA)계좌의 일부를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여기까지의 협상 분위기와 결과에 북한과 미국이 대체로 만족하고 있어 다음 협상은 늦어도 1월 하순에는 재개될 전망이다.
흑연감속로 가동 중단에 관한 주고받기 흥정이 끝나고 다음 단계인 흑연감속로와 핵무기 폐기 문제로 들어가면 문제는 어려워진다. 미국이 주장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폐기(CVID)가 등장하는 순서가 되기 때문이다. 주고받기라는 협상을 하는 한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북.미 간의 불신이 너무 깊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북한이 어딘가에서 핵시설을 가동할 것이라고 의심한다. 북한은 북한대로 미국이 핵을 포기한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할 것인가 의구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가지 이유로 조심스럽게 낙관하고 싶다. 하나는 금융제재 해제에 관한 북한의 요구가 너무 절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에 대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태도가 클린턴 정부의 페리 보고서 수준으로 바뀐 것이다. 페리 보고서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하자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 수뇌와 함께 종전선언에 서명하는 이벤트 이상으로 김정일과 북한 체재를 존중하는 제스처는 없다. 6자회담은 길고 지루한 협상이 될 것이다. 각오가 필요하다. 2006년의 세모에서 보는 한국은 너무 살풍경하다. 대통령의 잦은 도발적 발언과 정부의 온갖 실정(失政)에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핵겨울이 따로 없다. 그래서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한줄기 봄바람이 베이징에서라도 불어오길 바란다. -중앙일보 12월21일자에서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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