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세계화 부분에서 단연 우등생에 속한다. 지금 인도에서는 경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IT 산업에서부터 농업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경제 성장은 모두 세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의 과실이 극소수의 부유층에게만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빈곤층은 경제 기적과는 무관하게 살고 있다.
인도는 현재 3개의 경제권으로 나뉘어 있다. 첫번째는 부유한 기업가의 경제권이다. 이들은 외제 자동차와 최고급 이동전화, 신용카드 등을 사용하면서 서구의 상층 부르주아들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부유하게 살고 있는데, 10억 인구 중 약 2%인 500만 가구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 다음은 자전거 경제권이다. 이들은 전체 인구 중 약 15% 정도이며 시장 주변에서 상거래를 하고 있다. 이들은 TV와 전화, 자기 집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자전거를 이용해 경제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세번째는 전체 인구의 83%에 해당되는 사람들로 시장과는 무관하게 살면서 달구지를 이용해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인도는 2%의 부유한 엘리트와 98%의 가난한 주변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성장 한계의 신화
서구 학계에서는 한때 성장 한계론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것은 성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주장인데 지금 서구 사회가 그와 같은 성장의 한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이 합리적 관계를 맺을 때에는 지금의 성장세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인간도 탐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연과 합리적 관계를 맺는 “새로운 형”의 인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도 몇몇 서구 국가의 과속 성장으로 인해 그 이론적 기반이 무너져 버렸다.
그러한 주장의 극단적인 결과가 지금 인도에서 빚어지고 있는 부의 편재화 현상이다. 인도에서는 겨우 2%에 불과한 엘리트의 탐욕을 바탕으로 하는 급속한 경제 성장이 추진되고 있다. 한편, 98%의 가난한 민중들의 삶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빈곤을 견디기 힘든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이들 빈민들은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나 경제 성장에서 비롯된 극심한 배분 구조는 이들을 분노로 몰아넣었다. 그들도 가난은 단순한 통계 수치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불평등에 대한 분노
인구의 98%에 해당되는 이들 가난한 농민들은 종일 일하고 한 달에 1,000루피(약 $20) 정도를 번다. 그러나 뭄바이나 뉴델리의 상인들은 이들보다 100배 이상 벌고 있다. 특권 상류층의 생활은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어느 전직 장관의 딸은 향락적인 혼사 비용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농민들을 극도로 좌절하게 했다. 특히 그 녀의 아버지가 은행 등 금융계에 행사하는 영향력에는 모두 절망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농민들도 가난이 그들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그것은 게으름 때문도 아니고, 무식함 때문도 아니며, 오직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 동안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 준 종교도, 오랫동안 그들을 사로잡았던 전통적 가치관도 결국은 가난을 대물림하는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 가난한 농부들은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원한다. 그들은 지주에게 얽매인 소작농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땅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개혁의 길은 멀기만 하고
이제 인도의 농민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점점 더 큰 집을 짓고, 유명 디자이너들의 값비싼 옷을 사 입으며, 초소형 외제 모바일 폰을 사용하는 것을 더 이상 눈감아 주려 하지 않는다. 10대의 범죄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러한 분노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강도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 적지 않은 인도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이웃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네팔의 사회 혁명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군벌들과 탈레반은 절망에 떨어진 이들 젊은이들에게 진한 구애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아마 내일 쯤이면 알카에다도 여기에 합류할 지 모른다. 파키스탄에서는 종교 성직자들이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이용해 종교적 극단주의의 성채를 축성하고 있으며, 네팔에서는 마오쩌뚱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극렬성이 젊은이들의 호기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들 사회의 젊은이들은 지금 단 한 가지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가난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회 개혁은 요원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부유한 자들의 세계화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srips.org에서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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