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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에 직면한 법
김형선   |  2006-03-06 06:39:27  |  조회 2203 인쇄하기
좌회전 금지의 안전표지가 설치된 도로에서 운전자가 그것을 지키지 않고 차를 좌회전하면 도로교통법 제5조를 위반한 행위가 되어 처벌을 받는다. 운전자가 신호기나 안전표지의 신호 또는 지시를 위반하는 이유와 태양(態樣·상태)은 여러 가지일 수 있겠다. 신호나 안전표지를 잘못 인식하여 무의식적으로 위반할 수도 있고, 그 신호나 안전표지를 알고도 이를 단속하는 교통경찰이 없다든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나 사람, 기타 장애물이 없다는 등 주위의 상황을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위반하는 경우가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운전자가 그 신호나 안전표지를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하고서 이를 의식적으로 무시하면서, 나아가서 단속하는 교통경찰이 보고 있는 데도 보란 듯이 위반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교통신호 및 안전표지뿐만 아니라 교통경찰에 대한 도전이 된다. 또 그러한 행위를 용인하면 그러한 신호기 표시나 안전표지의 지시를 믿고 운행하는 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큰 혼란이 빚어지게 될 것이다.

한번 설치된 신호기나 안전표지는 그것을 설치할 때 그 당시 도로의 상황이나 교통량 등 제반사정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그 후 주위의 개발이나 제반사정의 변경으로 이미 설치된 신호기의 신호체계나 안전표지가 구체적인 도로상황에 맞지 않게 되었다면 그 신호체계나 안전표지를 변화된 상황에 맞게 당국이 이를 바꾸거나 제거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종전의 신호체계 등이 바뀌기 전에 운전자 각자가 그 신호체계 등의 불합리성을 주장하면서 이를 위반하면 교통사고가 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주위의 교통 흐름이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운전자는 위와 같은 신호체계와 안전표지 등을 당국이 바꿀 때까지는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법의 개념정의를 어떻게 하든 간에 법은 하나의 사회적 약속으로서 개개인의 주관적 가치관에 입각한 판단에 따라 지켜져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좋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본 교통의 신호체계나 안전표지와 같이 하나의 약속인 이상 그 약속이 변경(개정 또는 폐기)되기 전에는 지켜져야 하고, 이에 대한 도전은 국법질서 전체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에서는 법이 회피가 아니라 도전을 받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국가정보원의 불법감청을 둘러싸고 빚어진 도청 내용의 일부를 일각에서 공개한 소행을 들 수 있다. 국가기관인 국회는 통신 및 대화 비밀의 침해행위를 처벌한다는 통신비밀보호법을 제정했다. 같은 국가기관인 국가정보원의 직원이 이 법을 신뢰하고 통화하는 국민 개인간의 대화를 몰래 불법하게 감청한 행위는 참으로 위선적이고 염치없는 뻔뻔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몰래 저지른 것이므로 법에 대한 도전이라고까지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도청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하는 행위도 똑같이 금지하여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를 들어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당국이 누누이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개하여 진실을 밝히는 것이 정의에 맞는다고 외치면서 그 일부를 공개 또는 누설한 행위는 통신비밀보호법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 방송국 기자가 그 내용의 일부를 어떤 경로로 지득한 후 이를 공개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도청피해자 측에서 그 기자가 속한 방송회사 측을 상대로 공개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다. 법원은 그 신청을 일부 받아들여 공개금지 가처분결정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해 기자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방송을 통해 그 내용 일부를 보란 듯이 당당하게 보도하고 말았다. 그것은 법원의 가처분결정을 의식적으로 무시한 행위이고, 통신비밀보호법의 관계 규정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도청 내용의 공개를 주장하는 측은 ‘국민의 알 권리’(국민의 알 권리라는 용어는 실정법상 ‘공공기관의 정보 공개에 관한 법’ 제1조에서 발견된다)를 내세우기도 하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국민의 알 권리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헌법이 기본권으로 보장한 국민의 사생활의 자유(헌법제17조)와 통신의 자유(헌법제18조)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자유의 제한은 공공복리 등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라도 법률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워 통신의 자유를 보장한 통신비밀보호법의 관계 규정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여야 한다. 법을 어기면서 까지 하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 진실을 밝힌다는 명분으로 고문이나 폭행, 협박의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또 다른 사례를 들자면 모 교수의 6.25전쟁의 성격과 그 전쟁에서 수행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발언이 국가보안법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법무부 장관의 수사권 발동 및 이로 인한 검찰 총장의 사임을 초래한 사건이다. 국보법은 한 때 개정과 폐지를 둘러싸고 사회적인 심각한 갈등과 논쟁을 야기했지만 지금은 휴면상태이다. 현재 휴면중인 것은 국보법 자체가 아니고 이에 대한 개정 또는 폐지에 관한 논쟁이나 입법 활동 이다.

실정법으로 엄존하는 국보법 제7조제1항은 국가(대한민국)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법률규정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데도 현실에 합당하지 않는다는 등 여러 이유를 내세운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 하에 법규에 도전하는 행위를 방치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차를 방치함으로써 교통사고를 초래하고 나아가서 교통질서의 문란을 가져오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사회적 충돌과 무질서를 낳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이를 심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자에 악법도 법이므로 지켜야 한다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한 적이 없다느니 있다느니 하면서 악법은 법이 아니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일부에서 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말을 했든지 안했든지 간에 어떤 법이 지킬 필요가 있는 좋은 법이냐, 지킬 필요가 없는 악법이냐를 개개인의 주관적 가치관에 맡겨서도 되지 않고, 맡길 수도 없다. 개인적 판단에 따라 법을 지키든지 안지키든지 한다면 이는 법의 본질에 반하고 법의 존재이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법이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개·폐될 때까지는 그 법은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악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도전하는 행위는 사회 안정을 위해서 도저히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변호사/전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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