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 대통령 가운데 국민과 가장 친근했고 또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인물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대공황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집권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취임연설을 한 다음날부터 100일 동안 계속 각료회의를 열고 경제회생을 위해 유명한 뉴딜정책을 펴 나갔다. 동시에, 국가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민심의 확보가 제일의 과제라는 신념 아래 그는 매주 노변정담(爐邊情談)식 방송연설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국민을 위로하는 한편 경제상황을 솔직하게 알리고 정부의 대책을 설명하며 협조를 호소했다.
*** 왜 4대법안에 그토록 매달렸나
그의 끈질긴 노력은 절망 속에서 꿈쩍 않던 민심을 움직였다. 국민은 점차 그의 말과 행동에 신뢰를 보내면서 경제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 미국 경제는 마침내 소생했다. 전무후무하게 네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한달 만인 1945년 4월 그가 서거하자 온 국민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했다. 그는 국민의 마음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의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 장병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을 때 많은 국민은 모처럼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이때 말고는 지난해 국민이 감동의 박수를 보낸 일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탄핵이다, 천도(遷都)다, 과거사규명이다 하며 고달픈 서민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주제들이 지상을 뒤덮은 한해였다. A의 색깔이 붉으냐 희냐, B가 진보세력이냐 수구꼴통이냐, 심지어는 C의원의 선조가 독립투사냐 친일분자냐, 이런 문제로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는 소위 '당동벌이(黨同伐異)'는 계속되었고, 그 끝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겼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지만 성장도 분배도 모두 뒷걸음질만 쳤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위정자들이 민심읽기와 민심받들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국정의 추진이 탄력을 받으려면 먼저 민심이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개혁은 더욱 그러하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그 내용의 정당성과 필요성만으로는 부족하고 국민의 공감과 지지가 이를 받쳐 주어야 한다. 실상 지난해 온 국민이 가슴을 끓이던 경제문제와 민생문제를 제쳐두고 위정자들은 왜 4대 법안에 그토록 목을 맸는지, 특히 국가보안법은 왜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폐지되어야 하는지, 신문의 시장점유율은 왜 독자의 선택이 아니라 법으로 규제되어야 하는지, 인류역사가 근절시키지 못했던 성매매 행위를 몇 개의 처벌법규로 틀어막을 수 있는 것인지, 왜 특정세금은 단번에 몇 배씩 올려야 하는지 등등에 관해 과연 국민에게 얼마나 설득하는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민심이 무엇인가, 백성들의 마음의 흐름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막으려 해도 잘 막아지지 않고 돌리려 해도 잘 돌려지지 않으며, 잘못 건드리다가는 걷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 민심이다. 연초 교육부총리 임명시 비리문제로 대학 총장에서 물러난 전력이 있고 부도덕성과 의혹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사람을 "개혁의 적임자", "집 한 채밖에 없는 청렴한 분" 운운하며 감싸기에 급급했을 때 민심은 얼마나 분노했던가.
노 대통령은 지난주 연두회견에서 올해를'선진 한국의 출발점'으로 선포하고 장단기의 청사진을 밝히는 한편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천명했다. 반가운 이야기다. 우리는 이러한 천명이 화려한 수사(修辭)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도 대통령과 내각이 확실한 계획과 실천방안을 가지고 온몸을 던짐으로써 국민이 진심으로 그들을 믿고 따르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민심을 얻고 민심을 받드는 길은 다음 세 가지로 압축된다.
*** 말없는 다수를 바라보아야
먼저, 그 시대에 국민이 가장 원하는 선결과제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여기에 국정의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당연히 경제살리기와 민생안정이다. 둘째, 특정한 국정현안의 처리방향은 목소리 큰 몇몇보다 말 없는 다수가 바라는 쪽으로 잡아야 한다. 이것이 국민통합에 접근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셋째, 민심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장치가 완비돼 있어야 하고, 국민에게 나라의 일을 진솔하게 알리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해가 바뀌었다. 연초는 누구나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기다. 우리는 그 희망의 씨앗을 민심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2005.1.19일자 중앙일보
<김경한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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