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홀로 살지 않습니다. 여럿이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 사람이되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서로 다릅니다. 얼굴도 다르고, 몸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스스로 귀하게 여기는 것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살이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직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참 더 자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살이란 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도록 놓아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더 자랄 때까지 잘 크도록 다독거려 주어야 합니다. 사람살이가 이러합니다. 인류의 문화사가 무엇보다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록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할지라도 이에 대한 반응 또한 한결같지 않습니다. 그 다름을 갈등구조로 이해하여 다름을 서둘러 지워버리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름으로 이해된 나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나와 같이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없애려고 합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그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여기며 온갖 수단을 다 씁니다. 설득, 호소로부터 위협, 폭력 등에 이르기까지 선택에 한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다름은 그름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부닥치는 이러한 다름에의 접근은 이기고 지는 일을 최종적인 귀결로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 때 이기면 살아남지만 지면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생사를 두고 다투는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은 다름과 더불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처절한 싸움이고, 지면 죽는다는 신념으로 살아갑니다. 그 같은 삶이 때로 비장미가 넘치는 영웅의 모습으로 묘사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살이가 아니라 짐승살이입니다. 거기에는 약육강식하는 짐승의 으르렁거림밖에, 그것이 초래하는 낭자한 선혈의 흔적밖에,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가 행한 폭력의 부메랑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소멸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종말 밖에 없습니다. 사람살이가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반응도 있습니다. 비록 다름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내 진전에 장애로 여겨지기도 하고, 그래서 마침내 다름을 아예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싶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이 지닐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드려다 봅니다. 서로 같아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을 터득한다든지, 내가 미쳐 감당할 수 없던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든지, 서로 다름을 받아드리면서 갑자기 펼쳐지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확인한다든지 하면서 다름은 곧 조화로움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름’과 더불어 사는 삶은 승패를 가리는 싸움터가 아니라 다름이 어우러져 빚는 아름다운 현실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름은 다름을 준거로 한 판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옳음을 준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컫게 됩니다. 더불어 사는 어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길쌈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다름을 금 그어야 비로소 자기를 확인하고, 그렇게 잘라낸 다름을 그름으로 여겨야 또한 비로소 자기 옳음을 확인하고, 그러한 자기와 자기 옳음의 자리에서 죽기 살기로 싸움을 벌이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여긴다면 그러한 사람은 아직 사람구실을 하기에 너무 모자랍니다. 짐승살이를 사람살이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람살이의 한복판에서 짐승들의 포효가 너무 시끄럽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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